• 2025. 4. 27.

    by. 전염학자 가인

    팬데믹이 바꾼 거리, 건물, 공간의 역사

    질병은 인류의 생명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자체를 바꿔왔다.
    좁고 어두운 골목, 하수도 없는 거리, 공동 화장실—
    그 속에서 확산된 전염병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나서야
    도시를 설계하는 기준을 바꾸게 만들었다.

    전염병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기 위한 공간 구조의 재편을 불러왔고,
    그 변화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도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흑사병, 콜레라, 스페인 독감, 코로나19 등의 팬데믹이
    도시 공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살펴본다.


    1. 흑사병 이후 도시의 ‘공간 분리’ 개념 등장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도시 전체를 마비시켰고, 사람들은 밀집된 도시 환경이
    전염병의 최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도시는

    • 성벽 안에 밀집된 주거
    • 상업 공간과 생활공간이 섞여 있음
    • 하수, 쓰레기, 동물 사육 공간이 구분되지 않음
      등의 구조였다.

    흑사병 이후 일부 도시들은

    • 시장, 묘지, 병원을 성벽 외부로 이전하거나
    • 주거 밀집 지역을 계층에 따라 분리하고
    • 거리 간격을 넓히고, 공동화장실 대신 개인 배수 시설 도입 등
      위생 개념을 반영한 도시 조정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는 중세 말부터 **도시는 단순한 생활의 장소가 아닌 ‘방역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계기였다.


    2. 콜레라와 ‘하수도 도시’ 런던의 탄생

    19세기 런던은 인구 과밀 + 위생 미비의 대표 도시였다.
    인분은 길거리로 흘러내리고, 쓰레기는 템즈강으로 직행했고,
    수돗물과 오수가 같은 물줄기에서 공급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콜레라 유행과 함께
    도시 전체를 재설계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 1848~1854년, 수차례 콜레라로 수만 명이 사망하자
    • **조셉 바잘젯(Joseph Bazalgette)**는
      템즈강 주변에 200km 길이의 하수도 시스템을 설계
    • 런던은 세계 최초로 **‘공공 위생을 위한 인프라 도시’**로 거듭났다.

    이후 유럽과 북미의 주요 도시들은
    하수도, 쓰레기 처리장, 상하수 분리 시스템, 물 공급 정수화
    위생 기반 도시 설계를 도시계획의 기본으로 삼게 된다.


    3. 스페인 독감과 공공 공간 설계의 변화

    1918년 스페인 독감은 세계 전역에서 5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남겼다.
    이 팬데믹은 군막사, 병원, 학교, 기차역 등 공공 다중이용시설에서 감염이 집중된다는 사실을 드러냈고,
    그에 따라 도시 공간 설계의 기준이 바뀌었다.

    • 병원 설계에 환기, 공간 분리, 병실 배치가 중요하게 반영되었고
    • 학교, 극장, 기차역 등은 환기창, 출입문 동선 분리, 좌석 간 간격 확대 등이 도입되었다.
    • 대형 공원과 광장을 **‘도심 속의 환기구’**처럼 활용하며
      시민이 모여도 밀집되지 않는 공공 공간 구조를 고민하게 된다.

    즉, 이 시기는 ‘건물의 숨구멍’,
    도시의 위생적 재구조화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세계사 ❘ 전염병 이후 도시 설계는 어떻게 바뀌었나?


    4. 코로나19와 도시의 재인식 – 디지털 + 거리 중심 공간

    2020년 코로나19는
    거리 두기라는 생활방역 개념을 전 세계에 일상화시켰다.
    그에 따라 도시의 구조도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 도서관, 박물관, 카페 등은 테이블 간 거리 확보, 동선 단방향화
    • 식당, 미용실, 병원 등은 예약제 기반 운영 + 접촉 최소화 설계
    • 공공교통 공간은 환기 강화, 손잡이 소독, 비대면 발권 등으로
      점차 비접촉·비밀집형 공간으로 재구성되었다.

    또한 원격근무와 재택근무의 확산은
    ‘도시 중심에 출근해야 한다’는 기존 전제를 흔들었고,
    위성도시, 재택형 주거, 분산형 상업 공간이라는
    **‘포스트-코로나 도시 구조’**의 등장을 예고하게 된다.


    5. 도시 설계는 질병 대응의 최전선

    감염병은 단순히 질병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도시의

    • 거리 너비
    • 건물 간 간격
    • 공공장소의 밀도
    • 환기 구조와 쓰레기 처리 방식
      등이 전면적으로 재조정되며,
      도시는 ‘살기 위한 기술’로 진화한다.

    질병이 반복되면, 도시는 그 흔적을 공간 구조로 기록한다.
    방역 중심의 도시 설계는 일시적인 반응이 아니라,
    인간 생존의 경험이 쌓인 결과물이다.


    6. 결론: 도시에는 질병의 기억이 남는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넓은 거리, 공공 하수도, 분리된 병동, 바람이 통하는 창문,
    그리고 열 체크 장비와 자동문까지—
    모두가 한때 전염병 앞에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전염병은 매번 도시를 위기로 몰아넣었지만,
    그 위기에서 새로운 기준과 질서, 설계 방식이 태어났다.

    도시는 단지 사람의 공간이 아니라,
    질병과 싸운 기억의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