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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가두어 병을 막는다는 아이디어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입국 금지”, “자가격리”, “도시 봉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우리는 이런 단어들을 일상처럼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방역 조치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격리(quarantine)’라는 발상은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해 왔고,
그 기원은 바로 중세 유럽에서 시작된 전염병 대응이었다.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람을 분리하고, 도시를 닫는다는 아이디어는
인간 사회가 감염병이라는 위기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대응했던
매우 역사적인 선택이었다.
1. 고대의 질병 인식과 ‘자연 격리’
격리의 개념은 인류 초창기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고대 문명에서는 감염자를 피하는 방식으로 ‘자연 격리’가 이루어졌고,
특히 **나병(한센병)**이나 피부병, 악취가 나는 질환에 걸린 사람은
사회에서 분리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구약성경에는 나병 환자가 성 밖으로 쫓겨나고
일정 기간 후에야 다시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다는 규정이 등장한다. - 중국 고대 기록에도 전염성이 의심되는 질환이 나타나면
환자와 가족이 **‘두문불출’**하도록 명령하는 사례가 있다.
이처럼 공포에 기반한 거리 두기는 자연스럽게 인류 사회에서 형성되었고,
이는 훗날 ‘공식 제도’로 발전할 토대를 만들었다.
2. 흑사병과 최초의 도시 봉쇄
격리의 제도화는 14세기 중반 **흑사병(Black Death)**으로 본격화된다.
1347년, 이탈리아 제노바 항구에 흑사병이 상륙하자,
유럽 전역은 순식간에 공포에 빠졌고,
각 도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외부인 차단’을 선택하게 된다.이탈리아 베네치아는 1377년,
아드리아해에 있는 **라자레토 섬(Lazzaretto)**에
외국에서 온 선박과 승무원을 40일간 격리시키는 ‘검역(Quarantine)’ 제도를 도입한다.
이 40일(Quaranta giorni)이란 말에서 Quarantine이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이후 프랑스 마르세유,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도
유사한 검역소와 격리 정책을 도입하며
격리는 점차 도시 방역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3. 동아시아의 격리 개념 – ‘이동 금지령’과 ‘구휼 체계’
아시아에서도 격리 개념은 일찍부터 존재했다.
조선, 명나라, 일본 등 유교문화권은 전염병이 돌 때
백성의 이동을 통제하고, 병자에게 약과 음식을 지원하는 제도를 운영했다.- 조선은 사역청을 통해 감염자 분리 수용소를 운영했으며,
- 역병이 돌면 **‘병인출입금지령’**을 발령해 마을 간 이동을 제한했다.
- 명나라는 각 성(省) 단위로 진휼창을 만들어 식량과 약품을 배급했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는 무함마드의 언행록 하디스를 바탕으로
**“역병이 퍼진 지역에 들어가지 말고, 나가지도 말라”**는
초기 형태의 격리 지침이 전해져 오고 있다.이처럼 공동체 질서와 왕권 통치의 일부로써의 격리는
동서양 모두에서 중요한 방역 수단이었다.
4. 격리의 진화 – 근대 의학과 도시 구조의 변화
19세기, 콜레라와 천연두 등의 감염병이 유행하면서
격리 제도는 더욱 세분화되고 제도화되었다.- 프랑스는 격리 병동과 **감염병 병원(hôpital d’isolement)**을 설립했고,
- 영국은 **격리선(Quarantine ships)**을 항구에 정박시켜 승객을 검역했다.
-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질병 분류와 격리 기준을 과학적으로 정립했다.
특히 도시 설계 측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좁은 골목과 공동 화장실이 질병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되며,- 도시 하수도 시스템 정비
- 병원 설계 시 공기 흐름과 공간 분리 고려
- 격리소, 병원, 공동묘지를 도시 외곽으로 이전
등의 근대 도시계획과 방역정책이 격리 개념과 함께 진화하게 된다.
5. 코로나19와 ‘현대적 격리’의 문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격리를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행한 첫 사례였다.
초기에는 질병의 성격조차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경 봉쇄
- 도시 셧다운
- 자가격리 14일
- 지역 간 통행 제한
등이 강제되었고, 이는 현대 사회에 전례 없는 정지 상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디지털 사회, 이동 중심 경제,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는 시대에
격리는 단순히 방역이 아니라 권리 침해, 생계 파괴, 정신 건강 문제로 이어졌다.격리는 여전히 방역의 기본 수단이지만,
과학적 근거, 사회적 합의, 정보 투명성, 복지 보완책이 함께 가야만
현대적 격리는 비로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6. 결론: 격리는 언제나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격리는 병을 막기 위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사회가 약자를 어떻게 대하고, 국가가 어떤 윤리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시험대이기도 하다.중세에는 공포로 병든 자를 몰아냈고,
근대에는 관리와 감시로 격리를 제도화했으며,
오늘날 우리는 격리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법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질병은 인류의 끊임없는 적이지만,
그에 맞서는 방식은 우리의 철학, 과학, 윤리의 수준을 반영한다.격리의 역사는 곧 인간의 존엄과 공공의 이익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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