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 전염병 이후 여성의 역할 변화
위기가 만든 기회, 팬데믹이 흔든 성별 역할의 경계
인류는 역사상 수많은 팬데믹을 겪었다.
흑사병, 천연두, 콜레라, 스페인 독감, 코로나19까지—
질병은 사회를 흔들고, 때로는 기존 질서의 재편을 촉발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여성의 역할 변화다.
전염병은 단지 인명을 앗아가는 재앙이 아니라,
노동력, 가정 구조, 사회 시스템의 공백을 만들었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여성들이 새로운 자리에 서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세계사의 주요 전염병을 중심으로
그 이후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본다.
1. 흑사병 이후의 유럽 – 노동력 부족이 만든 여성의 진출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인구의 약 30~50%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특히 남성 중심의 노동 인구가 대규모로 사라지면서,
사회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 인력이 시급히 필요했다.
이 시기 여성들은
- 농업 현장
- 시장 상점
- 수공업 직종
- 상속과 유산 관리
등에서 점차 활동의 폭을 넓히게 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길드(조합)와 상업에서 여성의 참여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거나 가업을 운영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또한 흑사병 이후 노동자의 협상력이 높아지면서
여성 또한 임금을 요구하거나 노동 조건을 개선할 기회를 얻게 된다.
물론 이 변화는 제도적으로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중세 유럽에서 여성의 경제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낸 중요한 사례였다.
2. 19세기 콜레라 시대 – 간병자로서 여성의 이중 역할
19세기 유럽과 아시아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당시,
여성은 주로 **‘간병자’ 또는 ‘희생자’**의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 가정 내에서 아픈 가족을 돌보는 간병자
- 의료 시스템 밖에서 돌봄을 담당하는 비공식 간호자
- 때로는 감염자와 함께 격리되는 존재
당시 여성은 의료 행위에 참여할 수 없었고,
공식적인 권위도 없었지만,
실제 질병 대응의 최전선은 여성의 돌봄 노동이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비가시적 노동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여성의 희생은 오히려 ‘모성’이나 ‘헌신’으로 미화되며 제도화되지 않았다.
이 시기의 교훈은,
전염병 대응에서 비공식적 간호·돌봄 노동이 얼마나 중요한가 와 동시에
그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3. 스페인 독감과 여성 노동력의 제도화
1918년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과 시기적으로 겹쳤다.
전쟁으로 많은 남성들이 전선에 나가면서,
산업과 행정, 병원,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들이 대거 고용되었다.
특히 병원에서는 여성 간호사가 공식적으로 고용되었고,
전염병 대응에 있어 ‘여성 의료 인력의 필요성’이 제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 시기 등장한 여성들은 단지 보조 인력이 아니라
주체적인 감염 대응자로 활동하면서
근대 간호학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여성 교사, 타자수, 행정직 등
사무직으로 진출하는 여성의 수도 급증했으며,
이 변화는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일시적이지 않은 구조 변화임을 입증했다.
4. 코로나19와 돌봄의 재조명 – ‘필수노동자’가 된 여성들
2020년 이후의 코로나19 팬데믹은
역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실시간 감염병 위기였다.
그 안에서 여성은 다시 한번 돌봄의 전면에 서게 된다.
- 간호사, 요양보호사, 보건소 인력의 대다수가 여성
- 아동 돌봄, 온라인 수업, 가사노동의 책임 역시 여성에게 집중
- 의료 외 서비스업(마트, 택배, 돌봄 서비스 등)에서 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음
이로 인해 ‘필수노동자(essential worker)’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팬데믹이 없었다면 ‘저임금, 저 가치’로 평가되던 노동이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 인프라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들은
- 경력 단절
- 가정 내 폭력 증가
- 일·가정 양립의 부담 심화
등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즉, 코로나19는 여성의 기여를 가시화한 동시에,
구조적 성차별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5. 전염병이 여성에게 남긴 것들
전염병은 여성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고, 새로운 권리를 주장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 흑사병은 여성의 경제 참여를 가능하게 했고,
- 콜레라는 여성 간호 노동의 필요성을 드러냈으며,
- 스페인 독감은 여성 고용을 제도화했고,
- 코로나는 ‘돌봄 경제’라는 개념을 사회에 안착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단기적으로는 퇴행하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여성의 역할과 권리를 확대해 온 흐름으로 작용해왔다.
특히 감염병 이후 사회가 어떤 제도를 만들고, 무엇을 기억하는가에 따라
여성의 기여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도,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
6. 결론: 위기는 기회인가, 전환점인가
‘전염병은 평등하지 않다’는 말처럼,
질병은 약자에게 더 가혹하며,
그중에서도 여성은 돌봄 자이자 생존자, 그리고 피해자로
가장 많은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고통의 순간들이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고,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전환점이 되었다.
전염병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 이후 사회가 무엇을 배웠고,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답 속에는,
언제나 여성의 목소리와 노동, 희생과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